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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 674 호 시민들이 피운 민주주의의 꽃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작성일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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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6524
최정원

5월은 가정의 달로, 우리에게는 행복의 봄날이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피로 물든 아픈 역사의 행적을 가지고 있는 날이었다.

그 중심에 민주화의 첫걸음이 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아픈 봄날로 남은 그날의 행적을

따라가, 비극적인 역사와 마주해 현재 우리의 삶의 소중함을 돌아보고 잠들어있던 역사의식을 깨워보자.

더불어, 우리 학교 주변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역사박물관들도 탐방해보자.


발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자, 민주화를 열망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이에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통해 민주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면서 규탄 집회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서울역 회군

 서울 지역 27대 대학 총학생회는 "우리의 평화적 교내 시위는 이제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싸울 것이다."라고 결의하고 5월 15일 오후 3시경, 서울역 인근에 서울 시내 30개 대학생 10만 명을 모아 '계염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했다. 서울역 광장 앞에 모인 학생들은 임시연단으로 세워진 버스 지붕에 올라 "서울역을 사수하자"라고 외치고 시위대는 이에 호응했다. 이후, 대규모 유혈사태를 우려해 해산하게 되고 신군부는 5.17 비상계염 전국확대 조치로 정권을 장악하고, 야당 정치인들과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했다.

5.18 민주화 운동
 18일 아침 10시, 전남대에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붙잡혀 휴교령이 내려졌지만, 10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은 전남대 교문으로 모였다. 학생들은 교문 근처 다리인 용봉교 사이에서 군인들과 대치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 때 장교가 한 학생을 붙잡고 마구 구타하자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고, 돌격하는 소리와 함께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과 광주역에서 재결합한 학생들 1000여 명과 함께 금남로로 향해 연좌농성을 벌였다. 계엄군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을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에 따라 군용 트럭에 전원 체포하고 구타했다. 이때 농아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사망하게 됐다.


5월 19일
 신군부는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소요진압작전을 못하고 고전을 치루는 것을 보고 11공수여단을 동원하여 19일 밤 1시 50분 경 출동한다. 오전 10시 금남로에 3000~4000명의 광주시민이 모여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입지를 다진다. 10시 40분 경 경찰과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이 시작되었고 계엄군의 총기사용이 시작된다. 오후 4시 50분 최초의 발포로 고등학생 김영찬군이 총상을 입고, 강경진압에도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5월 20일

19일 밤 각 가정에 총기발포와 두 번째 사망자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의 자발적 모금으로 가두방송단을 조직해 정보를 전달하고 계엄군에 대항할 도구를 운반한다. 20일 오후. 택시운전사 200여명이 금난로 시위에 동참해 자동차를 엄폐물 삼아 시민들이 진격하게 되자 계엄군은 점점 수세에 몰린다. 그러자 20일 밤, 계엄군은 시민들을 상대로 최초의 집단적 발포를 자행한다.


5월 21일

"군의 사과와 시민의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타협하자"라며 정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공수부대는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헬기까지 동원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경찰서, 예비군 훈련소 등을 통해 총기를 보급하고 오후 3시 최초의 시민군이 등장한다. 오후 5시 시민들의 무장과 죽음을 무릅쓴 항쟁이 계엄군을 후퇴시키고, 후퇴한 계엄군은 광주로 오는 모든 길목을 차단해 광주를 고립시킨다.


5월 22일 ~ 5월 27일

 22일, 20사단이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하고자 주변 지역에 총을 난사해 주변 민가에 살던 민간인들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25일에는 이른바 ‘독침사건’이 일어나며 계엄군 측 정보요원들의 공작도 심해졌다. 시민군 중 하나였던 장계범은 갑자기 "독침이다"라며 쓰러졌고, 옆에 있던 정향규는 그를 도우려고 상처에 입을 갖다 댔다가 역시 쓰러졌다. 이 사건은 결국 계엄군 측이 벌인 조작사건으로 밝혀졌다. 26일, 도청 내에서는 계엄군을 막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고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면서 수습위원들을 이끌고 시민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긴 행렬을 이었다. 훗날 이는 ‘죽음의 행진’이라고 불렸다. 27일에는 계엄군이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상무충정작전'이란 명칭으로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대신 찾아가 드립니다 - <역사박물관> 편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세계에서 유일한 박물관이다. 조선시대의 서울부터 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성장기 시대의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설전시존이 대표적이다. 또, 도시 모형 영상관 등을 통해 다양한 매체로 역사를 접하고 체험해 볼 수 있다. 현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이라는 전시회가 5월 26일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영상으로 보여준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9시부터 8시까지 개관한다. 경희궁 내에 위치해 있으며 광화문역, 경복궁역 등에서 1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다. 역사를 직접 배우고,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서울역사박물관을 방문해보자.


 <독립기념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사시대부터 1945년 광복 즈음까지 독립의 순간이 기록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의 상징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기와집 겨레의 집 뒤로 총 7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통일 염원의 동산, 추모 공원, 독립군 체험학교 등에서 다양한 역사적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이곳은 관람 길이 총 세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역사 일기 관람, 자연 속의 기념 시설 관람, 선열들의 애국 시와 어록비 관람으로 나뉜다. 독립기념관은 매주 월요일은 공휴일인 경우만 개관하며 하절기에는 9시 30분부터 6시, 동절기는 9시 30분부터 5시까지이다. 천안역에서 25분 소요되며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독립기념관 정류장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우리의 역사를 깊이 알고, 전시관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역사 경험을 쌓고 싶다면 천안 독립기념관에 방문해보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역사가 기록된 역사문화공간이다. 제1 전시실은 1876-1948년 대한민국의 태동, 제2 전시실은 1948-1961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6.25 전쟁의 실상, 근대 국가의 모습 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대한민국 그날이 오면’이란 주제로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어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전시 곳곳에 놓여있는 흥미로운 주제별 전시해설 자료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만의 상징이다. 관람 시간은 10시부터 6시까지,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후 9시까지 야간 개장한다. 광화문역 2번 출구 혹은 KT광화문지사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위치해 있다. 관람료도 무료이니 부담없이 역사를 몸소 느끼고 오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