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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82 호 [사설] 우리,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 작성일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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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211
이해람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형색색 단풍들을 보며 가을을 즐기고 풍요를 꿈꾸었는데, 풍성하던 나뭇잎들을 다 떨궈버린 나목을 기어이 마주하게 되었다. 수확의 계절을 보내고,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점에 서면 우린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느낀다. 세찬 바람은 가슴 속까지 후비고 들어와 가뜩이나 허허로운 마음을 더욱 소용돌이치게 만든다. 무엇인가를 마감하고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은 오고가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건만 사람들은 유독 시간과 계절의 변화 앞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내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일궈놓은 것은 어느 정도인가, 나는 얼마만큼 변화하고 발전하였는가 등등 불과 몇 개월 전의 자신과 비교하며, 때로는 남들의 그것과 견주어 보면서 허망해하거나 내적 상실감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의 이런 습관적 회고, 즉, 수확에 대한 부담이나 수확의 종류와 양에 대해 남들과 비교하는 태도는 농경사회의 유산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농경사회를 거치면서 생산물이 곧 가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유일한 수단과 통로가 되었던 시절의 유전인자가 지금껏 남아 한해살이의 끄트머리에서는 늘 한 해를 통산하는 상념에 빠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방면으로 빠르게 진보해 나가는 세상을 생각해보면 계절의 순환 앞에서 보이는 인간의 상념과 결실에 대한 압박, 두려움, 허탈감 등을 농경사회의 유산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방식은 무언가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가을의 끝은 겨울로 이어지고, 한 해의 끝은 새로운 한 해로 연결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오늘은 또 다른 내일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감’이 곧 끝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학기의 끝에서, 한 해의 마지막에서 수확에 대한, 열매에 대한, 과실에 대한 걱정과 초조함, 불안감을 새삼스럽게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지금껏 연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매 시간 충실하게 삶을 영위하면 되는 것이다.


모두가 선두를 달릴 필요도 없다. 꼭 승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꼭 남들보다 더 많이 수확해야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어느 분야이건 꼭 필요한 사람이면 된다. 진정한 승자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고, 그의 인격에 반하고 매료되어 따르게 만드는 사람이다. 겸손하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여 겸양하며 양보해주고, 하고픈 말이 많아도 타인의 말에 마음과 귀를 먼저 열게 되면 남들보다 뛰어나 으스대지 않더라도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히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이들이 진정한 승자요, 강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그가 남긴 『도덕경』에서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이라 하여, 큰 나라는 큰 강의 하류와 같아서 천하 사람들이 사귐을 위해 모여드니 천하 만물의 어머니와 같다고 하였다. 하류는 어떤 곳인가? 모든 물길이 모여드는 곳이고, 온갖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며, 모든 것을 품는 속에서 나눔과 베품의 손길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크고 강한 나라는 스스로 겸양하여 힘없는 작은 나라가 저절로 따르게 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겸양함으로써 큰 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상호간 생존의 길을 열어가게 된다. 이로써 공생과 공영이 이루어지나니 선두에 선 자나 뒤를 따라가는 자나 서로를 배려하며, 양보하며 각기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면 그 뿐인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으스대며 잘난척하는 자는 강자로서의 하류가 품고 있어야 할 겸양의 미덕을 모르는 자요, 남들 위에 서서 목소리를 키우며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 역시 뒤쳐진 이들을 위한 배려심이 없는 자들이다. 강의 하류가 가지고 있는 무한하고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더 이상 강자가 아닌 것이다. 거꾸로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며, 겸손과 겸양의 미덕으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진정한 승자이자 강자요, 강의 하류에 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당장의 결실이 없어도, 눈앞의 결과가 초라해도, 한해살이를 통해 이룩한 성취가 미미해도 그것은 파편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넉넉한 품으로, 크고 넓은 가슴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매 시각 충실하며 세상살이의 희망과 포부를 품어나갈 때 진정으로 두려움 없이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해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시간은, 계절은, 무한히 연속되는 자연의 순리일 뿐, 그 안에서 생물학적 삶을 넘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경영해 나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내 안에 들어있는 타인의 시선과 잣대를 거둬내고 길고 넉넉한 품의 여유를 가질 때 우리는 참된 삶을 꿈꿔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으로, 진정한 강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