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메뉴
닫기
검색
 

학술상

[소설 가작]직선으로

  • 작성일 2023-12-22
  • 좋아요 Like 4
  • 조회수 1813
김상범

[소설 가작]직선으로

 

  소희는 4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명동에 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해지도록 신고 있는 낡은 어그 부츠,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큰아버지가 사주신-그녀의 유일무이한 명품-블랙 프라다 반지갑. 그리고 길거리를 걷다 보면 두세 명은 꼭 겹치는, 희소성이라곤 전혀 없는 보세 옷을 걸친 본새였다. 손잡이를 잡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은 영하로 떨어진 기온이 무색하게 후덥지근했다. 다들 명동에 가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태우고도 곧잘 운행하는 교통의 용이함을 몸소 느끼며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려고 손을 움직이는 순간, 덜컹, 하마터먼 넘어질 뻔했다. 아무래도 이 비좁은 공간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하기엔 여유가 너무 없지. 소희는 핸드폰 꺼내기를 포기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핸드폰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손쉽게 하고 있는 남자의 화면에는 ♥로 저장된 누군가와의 연락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여자 친구였다. ‘자기야 어디야?로 시작해 무수히 쏟아지는 애정 표현들과 간간이 보이는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이 달달해 하마터면 동공이 녹을 뻔한 소희는 눈을 돌려 대각선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짙은 화장에 실버 목걸이를 하고 머리를 배배 꼰 여자. 고데기에 시간 꽤나 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목걸이의 가격을 생각하며 고데기를 데울 시간에 미용실 예약이 더 쉬운 사람이겠다고 마음대로 추측해 본다. 다소 음침한 탐구 활동을 즐기며 시간을 죽이니 금방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명동, 명동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소희는 몸을 구기고 비틀며 문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래, 달팽이도 바다에 꿈을 두는데, 저 지하철 문에 다가가는 걸 꿈으로 두는 게 뭐 대수라고. 이 좁고 더운 지옥에서 기필코 탈출하리라 마음먹는 게 뭐 대수라고.’


  치이익, 문이 열리자, 소희는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몸을 떠민다. 내릴게요, 내릴게요. 잠시만요를 다섯 번 정도 외치며 용감하게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한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디로 가는 지로 모른 채 갇힐 뻔했다. 늘 타는 지하철이지만 이럴 때마다 무섭기도 했다. 못 내렸으면 어쩔 뻔했어. 적응되지 않는 지독한 인구 밀도에 질린 듯 몇 마디 웅얼거린다. 소희의 어리광은 3분 정도면 끝난다.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를 내려놓고 아직 내리지 못한 수많은 여정을 싣고 가는 4호선을 잠시 응시한다. 저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얼마나 간절하면 저 틈에 끼는 것도 마다할까. 그러다 이내 걸음을 딛는다. 낡은 어그의 감촉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는다. 그녀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공간이, 교통 체증을 감내하면서까지 가야만 하는 목적이란 게 있었다. 


  삐빅,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출구로 나서자 컨테이너 박스처럼 딱딱하던 지하철의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겨울만이 가득했다. 흘러나오는 캐럴과 가게마다 즐비한 크리스마스트리, 거리 곳곳에 늘어져 있는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영하의 온도까지 녹이는 듯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란 사람을 가볍게 만들기 좋았다. 소희만 빼고. 중심가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숲을 이룬 나무들처럼 빽빽하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고등학생 무리들이 있고, 시밀러룩을 맞춰 입고 서로를 껴안는 연인도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강아지를 품에 안은 가족들도 있었다.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구경하던 소희는 남들 다 쓰는 에어팟 대신 한철 지난 이어폰을 꽂는다. 늘 오래된 것들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그녀였다. 귀에 욱여넣는 멜로디도 역시 한철 지난, 그렇지만 사랑받는 김광석의 노래들. 그의 음절을 듣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차가 밀려 떠들어대는 자동차의 경적도, 설렘으로 헬륨처럼 한없이 가벼워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도, 겹겹이 쌓여 어지러운 팝의 영어 가사들도, 세계를 감싼 즐거운 리듬도 소희의 이어폰 앞에서는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소희에게 외로움이란 너무나 당연해서 없는 듯하면서도 꾸준히 존재하는, 마치 닦지 않는 책장 위 수북이 쌓인 먼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치우지 않는다. 치워도 치워도 자연스럽게 다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녀였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읊조리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숨을 쉴 때마다 후, 후 불어 나오는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 이내 캐럴 속으로 사라진다. 그걸 지켜보는 것이 소희가 겨울을 음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걸음을 뗀 그녀의 목적지는 명동 골목의 어느 즉석떡볶이집이었다. 번화가가 아니라 인적이 드물고 그래서인지 겨울 냉기가 코트를 뚫고 느껴지는 곳이었다. 거리의 빈틈을 노려 그녀의 외로움도 점차 부피를 넓혀 가는 아홉 시 사십 분, 마지막 코너를 돌았더니 낡은 가게 간판이 보였다.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만 이미 추위에 붉어진 손을 꺼내 가게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소희의 눈에 테이프로 붙여져 있는 에이포 용지가 보였다. ‘임대 예정’ 단 네 글자였다. 결국 노크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서게 된 소희는 여정의 실패에도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듯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어그 부츠를 질질 끌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보폭이 좁아지더니, 별안간 걷는 것을 포기하는 소희. 코너 직전 블록에 서서 가만히 호흡한다. 물론 이건 소희의 희망에 불과할 뿐이다. 가만히 호흡 하는 것은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추워서 몸이 떨리는 거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녀가 내뱉는 공기엔 이제 여분의 습기가 젖어 들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캐럴,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브의 저녁, 그 공간 속 소희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세계에게 부정당한 불행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만 같았다. 결국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펑펑 운다. 이건 추위 때문도, 타인의 행복 때문도 아니었다. 소희는 저 네 글자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너무 시렸다. 무언가의 부재는 이제 그녀에게 버거웠다. 안녕을 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그녀는 아직 어렸다. 


  소희가 명동에 오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지난 겨울까지 소희 곁엔 재영이 있었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둘은 줄곧 친구로 지냈었다. 사는 동네가 비슷했고, 취미가 비슷했고, 성격이 잘 맞았다.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서 공부를 같이 했고, 나란히 전교 일이 등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어쩌다 같이 영화를 보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도 소희에게 재영은 그리 무겁지 않은 존재였다.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기도 했을뿐더러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 그저 좀 귀여운 경쟁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다 수능이 끝난 열아홉의 겨울 어느 하루, 재영이 먼저 고백했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고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 마셨던 날,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고백하던 재영의 귀는 터질 듯 빨갰다. 추위 때문이었는지, 소희 때문이었는지는 재영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너 좋아한다, 소희야.” 

  “너랑 쭉 같이 있고 싶어. 다음 겨울도, 그 다음 겨울도 말이야.” 

  “이건 좋아하는 거 맞지?”  


  고백을 들은 소희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코코아를 떨어뜨릴 뻔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짧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보다 좋은 친구로 오래 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려고 한 순간,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알고 싶으면 눈을 보라고 누군가 그랬었던 것 같은데. 소희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사랑을 많이 해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담은 재영의 눈동자는 처음 보는 색이었다. 코코아색보다 짙고, 우주보단 덜 어두웠다. 소희는 그 작은 동공에 담긴 자신이 신기했다. 그래서 재영의 마음을 받기로 했다.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보는 사람을 재영이 처음이어서, 그 새로움과 낯섦이 설레고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소희의 볼도 빨개졌을 것이다. 이건 재영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소희와 재영은 쭉 함께했다. 첫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주민등록증을 이마에 붙이 고 술집에 들어가 보고, 취할 때까지 소맥을 말아 마셨다. 누가 봐도 비틀비틀 걷고 있으면서 자기 똑바로 걷는다고 우기는 재영의 볼에 소희는 입 맞췄다. 귀엽다면서. 봄엔 함께 벚꽃을 보러 다녔다. 개화 시기에 맞춰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려고 애썼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에서 둘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사랑을 만끽했다. 벚꽃축제에서 파는 비싼 닭꼬치도 한 입씩 나눠 먹고, 포토 스폿에서 서로를 담았다. 여기 봐, 재영아. 너 지금 진짜 예뻐. 소희는 벚꽃도 좋았지만, 곧 산발할 봄에 선명히 존재할 재영이 백 배 더 좋았다. 여름에는 바다를 보러 갔다. 재영은 바다를 좋아했다. 파도의 파열음이 좋다고 했다. 소희는 재영을 좋아하면서 바다도 함께 좋아하게 됐다. 나뭇가지를 주워 젖은 모래에 이름을 쓰고, 샌들이 더러워져도 바다가 선사하는 낭만을 움푹 밟으며 놀았다. 장마철엔 우산을 쓰지 않고 밖에 나갔다. 온몸이 젖고 그다음 날 감기에 걸릴 것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비에 젖은 재영의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떨림과,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져 주는 재영의 손길은 언제 느껴도 짜릿한 애정으로 다가왔다. 가을엔 독서 데이트를 즐겼다. 망원동엔 둘이 자주 가는 헌책방이 그득했는데, 오죽하면 헌책방 사장님이 그만 좀 오라고 말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헌책 냄새를 향수 삼아 살았다. 소희는 시를, 재영은 수필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나와서는 거리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구경했다. 가끔 낙엽이 재영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 깔깔 웃었다. 소희에게 재영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이었다. 


  그리고 겨울. 소희와 재영은 연인으로서 두 번의 첫눈을 함께했다. 그리고 둘은 매년 겨울 마다 명동의 즉석떡볶이집에서 떡볶이 2인분, 튀김 세트, 어묵꼬치 두 개와 공짜 어묵 국물 세 컵을 즐겼다. 열아홉일 땐 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스무 살의 겨울에는 아르바이트 덕분에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재영이 계산했다. 자기도 이제 돈 버는 어엿한 성인 남성이라나 뭐라나. 소희는 어른인 척하는 재영이 웃겼지만 봐줬다. 재영이 하고 싶은 건 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떡볶이집을 나오자마자 재영의 손을 꽉 잡고 또박또박 얘기했다. 


  “내년엔 내가 사 줄 거야” 

  “아닌데? 내년에도 내가 사 줄 건데?” 

  “바보야, 내가 먼저 계산할 거거든” 

  “너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 아아 유치해” 


  싸움의 승자는 소희였다. 재영은 돈 많이 깨질 거라고 소희를 겁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였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니까. 결국 스무 살 땐 재영이, 스물한 살 땐 소희가 사 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소희는 자신이 당연히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재영도 그랬을 것이다. 둘은 영원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거라고 믿으며 선명한 행복을 주고받았다. 무뎌지지 않는 애정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사실도 둘은 몰랐다. 


  애정도 약속도 여전히 유효했던 유월, 재영은 소희를 만난 올해 여름의 토요일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안녕도, 작별 인사도 고하지 못하고 부서졌다. 줄곧 선하게 살았던 재영의 목숨을 앗아간 것 역시 선함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와중,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일 것만 같던 어린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선하게 끝난 그의 일생의 파편은 전부 소희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심장에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소희는 한동안 멍하니 함구하며 살았다. 자신이 죽은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가 머금을 수 있는 이름이 없었고, 그녀가 만질 수 있는 형태가 없었고,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에 대한 부재는 그녀의 모든 삶을 부정하게 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데 왜 여기 있어야 해? 소희는 재영과 함께한 계절을 사랑했지 그가 없는 계절까지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일상도, 그가 없는 세계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 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절망으로 귀결되는 순간들뿐이었다. 절망하는 게 습관이 되면 소희는 정말로 자기가 갑자기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재영이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만큼 속상하고 무의미한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거다. 소희는 재영을 알았다. 그래서 살아냈다. 나 너한테 떡볶이는 사 주고 죽을 거야. 그렇게 육 개월을 꼬박 버텨 맞이한 오늘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오늘, 애써 부정하고 지낸 너의 부재를 체감하게 하는 오늘 한가운데 나는 대체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재영아. 소희는 울었다. 그리움에 적셔진 차가운 아스팔트. 이어폰을 타고 들리는 노래. 추위에 지지직거리는 음성이 소희에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한없이 무너져 아파하던 소희의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주름 잡힌 손이 건넨 손수건이었다. 벌게진 눈으로 올려다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떡볶이집 아주머니. 소희는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벅벅 닦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요, 이렇게 다시 보니까 반갑네” 


  아주머니는 그 시간 그대로 멈춘 것처럼, 재영과 함께 왔던 그날과 똑같이 여전하셨다. 울고 있는 소희를 잠시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임대 예정이라는 에이포 용지를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온 소희는 거의 다 정리되어 쓸쓸함이 감도는 내부를 보니 자꾸만 서러워졌다. 이제 여기도 사라지는구나. 이제 너와의 추억도 희소 해지는구나. 다시금 재영을 생각해 보는 그녀였다. 


  “학생이 소희 맞지? 재작년부터 매년 오던” 

  “어떻게 아셨어요?” “기억할 수밖에 없지. 혹시 올해도 올까 하고 와본 건데,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하나 남은 테이블에 마주 앉은 소희는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갔을 때는 늘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연말이라 다른 가게 웨이팅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어서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늘 재영과 함께 왔었기 때문에 혼자 오면 기억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학생한테 줄 게 있어가지구” 

  “이거 안 주면 큰일 난다고 해서... 근데 같이 안 왔네” 

  “헤어졌어두 그냥 받어요” 


  다시 소희의 앞으로 온 주름진 손. 아주머니의 손에는 편지처럼 보이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편지 겉봉투에 정갈하게 적혀있는 소희에게. 작년 겨울, 재영이 떡볶이를 계산하면서 몰래 숨겨 달라고 했던 편지라고 했다. 소희한테는 비밀이라고, 내년에도 여기 꼭 올 테니까 그때 같이 오면 서프라이즈로 소희한테 주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던 재영. 1년이나 가지고 있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 거절했지만 재영이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고. 자기 이거 꼭 1년 뒤에 줄 거라고, 그러려면 아주머니 도움이 절실하다고 넉살 좋은 웃음을 띠던 청년이 마음에 들어 장롱 속에 꼭꼭 숨겨 두셨다고 했다. 그러다 가게를 내놓으면서 연말에 이사를 가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혹시 올까 봐 이번에도 나와 보신 거라고 담담히 말하시는 아주머니의 음성을 듣자 소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들어찼다. 재영은 수필을 좋아해 글을 자주 쓴다고 했지만 자신의 글을 소희에게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아무리 보여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떼를 써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였다. 소희에게 보이지 않았던 재영이 드러나는 순간. 감사 인사를 전한 후 편지를 받아 들고 나온 그녀는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 곧장 봉투를 열었다. 다시 오지 못할, 그녀의 유일과 재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소희는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희에게 


소희야, 나 재영이.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니까 어색해 죽겠다. 너한테는 내 글을 보여 준 적도, 써 준 적도 없어서 그런가 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사실 별거 없어. 나 이제 너 한텐 뭐든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너한테 고백하고 싶어서 적어 봐.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작년인가. 이건 아마 내년 크리스마스에 받을 거니까 네가 읽을 때는 재작년이겠네. 그땐 정말 떨렸어. 귀가 엄청 붉었을 거야. 그거 추웠던 거 아니고, 너한테 말하는 게 너무 떨리고 부끄러워서 그랬어. 나는 널 분명히 좋아했지만, 네가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거든. 그런데도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흘러넘쳐서 주체할 수가 없더라. 나를 받아 줘서 정말 고마웠어. 지금도 여전히 고마워. 내년에도 그럴 거야. 


빼곡하게 흰 첫눈 같은 소희야, 나는 지금 정도도 모르고 무모하게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적당 함을 모른 채로 누구보다 치기 어리게. 널 끌어안은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칠월의 더위보다 쉽게 녹을 것만 같아. 우리가 만난 지 벌써 2년이지. 내년에는 3년이 되겠다. 가끔 네가 너무 예뻐서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몇 번 말했었을 거야. 넌 너무 예뻐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럴 때마다 너는 단호하게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화냈었는데. 지금 떠올려 봐도 참 귀여워. 너는 늘 내 생각이 아무것도 아니게 해. 늘 나를 초과해. 그래서 네가 좋은가 봐.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든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이미 너는 나한테 너무 많이 묻어 있어서 지울 수가 없거든. 그리고 우리가 함께라면 두려울 게 뭐야? 지구가 사라진대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무섭지 않아. 언제나 명백한 사랑으로 살아갈게. 지금 옆에 있겠지만, 내가 이미 너한테 수백 번 말해 줬겠지만, 그래도 좋아해. 내 사랑이 언제나 너한테 당연한 일이었음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재영이가 



  이 순간만큼은 재영과 함께인 것만 같아서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기도 했 다. 재영이 그녀를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자기 없다고 울보처럼 울기만 하는 그런 여자친구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은 싫었다. 소희는 그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재영.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문장 하나하나 느껴지는 마음은 소희의 그리움을 앞질렀다. 그녀는 재영의 부재 이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비로소 내뱉는다. 뱉으면 사라질까 두려워 숨겼던 재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비로소 떠올린다. 목구멍에 맺힌 것들을 죄다 꺼낸다. 그녀는 이제 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랑도 있다는 걸. 영원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건 재영이라는 걸.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재영아, 메리 크리스마스” 


  언제부터였는지 언제 끝난 건지 소희는 지금도 모른다. 너무 잔잔하게 멎어서 많이 울었다. 눈이 아파서 세수를 하러 가다가도 울고, 빨래를 널다가도,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다가도 주저앉은 적이 허다했다, 오랜만에 숨을 쉬려고 하면 폐가 울었다. 안 울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글로 적으려고 하면 손이 굳었고, 일기는 늘 끝을 맺지 않은 채 덮었다. 자신의 구겨진 독백들은 어차피 재영에게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작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를 한철 인연이라고 생각해 봐도 소희는 그 인연에 자꾸 무너져서. 어쩌면 소희가 혼자 떡볶이집에 왔던 것은 더 이상 무너지기 싫어서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영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면 그렇게라도 그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재영에게 인사를 하니 이 순간이 오길 바랐던 듯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재영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눈 오는 성탄의 거리. 


  “분명 혼자인데 같이 있는 것만 같으면, 네가 정말 있다는 뜻일까?” 

  “이게 너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면, 그런 거라면 말이야” 

  “우리 이제 정말 작별하자, 재영아”


  소희를 닮은, 빼곡히 흰 눈이 내린다. 그녀의 어그 부츠를 적시며 소복히 쌓이는 하얀 결정에 뚜렷하게 깃든 온기. 재영일 거다. 


  “잘 지내, 나도 그럴게”



  소희는 4호선 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스물 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해지도록 신고 있는 낡은 어그 부츠,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큰아버지가 사주신-여전히 재영의 스무 살 주민등록증 증명사진이 들어 있는-블랙 프라다 반지갑. 그리고 길거리를 걷다 보면 두세 명은 꼭 겹치는, 희소성이라곤 전혀 없는 보세 옷을 걸친 본새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손에 꽉 쥐고 있는 한 통의 편지, 그리고 그녀의 몸 곳곳에 묻은 눈, 어쩌면 재영일지도 모르는 존재. 막차를 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 음침한 탐구 활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 소희는 앉자마자 명동에 갈 땐 꺼내지 못했던 핸드폰을 켜 메신저를 열었다. 즐겨찾기 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에 고정된 ♥가 눈에 띈다. 작년 여름에 멈춘 대화. 전화번호가 바뀌면 다른 사람이 메시지를 받을 테니 쉽사리 보내지 못했던 임시저장 메시지들도 쌓여 있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올려 작년 크리스마스로 돌아갔다. 즐거웠다고, 덕분에 재미있게 보냈다고 고맙다는 내용의 문자 몇 개와 사랑한다는 말. 메리 크리스마스와 트리 이모티콘 잔뜩. 떡볶이 사진과 어묵 꼬치를 들고 찍은 소희의 사진, 재영의 사진. 함께 찍은 셀카 한 장. 이제 찰나가 된 순간이 되었지만 소희는 그것 또한 가만히 느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안녕을 고했다. 재영에게, 재영의 옆에 있던 작년의 그녀에게, 재영과 소희의 시간에게, 둘의 현재였던 사랑에게.


  그렇게 소희는 돌아갔다. 그리고 나아갔다. 재영은 없으나 그의 마음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로. 이제 그가 없어도 따뜻한 겨울이, 그가 없어도 시원할 여름이 올 것이다. 가끔 감기도 걸리고, 우울할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고 해서 무너지고 절망하는 순간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재영의 부재가 선명할 아픈 미래도 그녀가 마주해야 할 하루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희는 매 계절마다 어김없이 안부를 전할 것이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늘을 떠올리며, 재영을 읽고 재영에게 읽히며 어김없이 살아갈 것이다. 이제 소희에게는 그녀가 그녀로 존재하며 살아갈 인생의 여정에 다다르고자 하는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으니까. 명동도, 떡볶이집도 아닌 아직은 희미한, 그렇지만 반드시 명백해질. 재영의 품에 파고드는 살결로 존재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언제나 사랑스러운 그의 연인으로서 말이다. 일렁이는 입김이 외로움을 불러도 이제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뒤돌아보지 않고 직선으로. 여전히 낡은 어그를 신고, 저 멀리 보이는 봄을 향해.


최지윤(역사콘텐츠전공)


우선 좋은 결과 주셔서 감사합니다! 투고에 의의를 두고 쓴 글이었고, 상을 받을 줄 몰라 너무 놀랐어요. 글을 쓰는 내내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서툴고 투박한 글인데도 보듬어 주시고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학술상이 저에겐 많은 꿈과 가능성을 안겨 준 기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언젠가 또 기회가 와서 다시 글로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