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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상

[소설 입선]​​​​힘들 땐 쉬세요

  • 작성일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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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982
김상범

[소설 입선]힘들 땐 쉬세요 


  부쩍 화가 많아졌다. 작은 일에 신경질이 나고, 참기 어렵다. 두목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웃음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러니 함부로 웃지 말라고 했다. 죽기 싫으면. 



  辛い時は休みます.



  사무실 벽면에 못 보던 액자가 걸려있었다. 이곳에 내 허락 없이 무언가가 들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누가 걸어놨는지, 언제 걸어놨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어 할 줄 아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못 들은 척 담배만 피우고 있다. 주먹이 나갈 뻔했다. 확실히 요즘 화가 많아졌다. 

  내 문신에도 일본어가 적혀있다. 두목이 하라는 대로 한 거라 뜻은 모른다. 두목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본어 문신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혹시 ‘저는 바보입니다.’ 같은 문장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설마 문신에 그런 장난을 칠까 싶었지만, 두목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목은 재밌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재밌는 일이 없다. 십 년 전에는 뭘 해도 재밌었다. 젊은 시절에 지금의 즐거움까지 전부 당겨 쓴 것이 아닐까. 종종 우울해진다. 

  -갱년기가 온 건 아닐까요? 

  요즘 부하들은 이런 식이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선배에게 저런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부하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젊음을 논하는 건 늙었다는 증거다. 나도 안다. 나는 늙고 병들었다. 

  두목은 지금의 나보다 늙고 병든 상태였다. 두목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은 그냥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다. 두목은 나를 싫어했지만, 능력은 인정했다. 두목은 내가 이유 없이 밉다고 했다. 내가 두목을 두목으로 불러서 일수도 있다. 

  -두목은 너무 깡패 같잖아. 

  깡패 맞으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것도 벌써 15년 전 일이다. 두목은 죽었지만 나는 살았다. 


  나는 두목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나를 따르는 몇 명이 있다. 건방지지만 뭐라 하지 않는다. 

  -내가 왜 너를 똘마니로 두는 줄 알아?

  언젠가 두목이 그렇게 물은 적 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두목은 답을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 액사였다. 누군가 목을 조른 흔적이 발견됐다. 두목의 목에서 지문과 DNA를 추출했지만, 범인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의심 가는 사람은 몇 있다. 두목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많다. 나는 아니다. 나는 두목이 죽은 후 두목이 되지 못했다. 구태여 그 자리에 오르려고 지금까지 버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놓고 모른 척한 건 좀 서운하다. 

  두목이 된 건 영수다. 영수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수는 이런 일을 하기에 너무 반듯한 이름이다. 영수는 영수라 불리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수라고 부른다. 영수는 나를 싫어한다. 상관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초로 가야 하는 건 영수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내가 영수를 싫어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수가 그냥 싫다. 말투도 마음에 안 들고 행동도 마음에 안 든다. 제대로 일 처리를 해본 적도 없고, 두목이랑 같이 있던 시간도 짧다. 

  -그건 그냥 싫은 게 아닙니다. 

  언젠가 부하들에게 말하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 

  영수가 나를 속초로 보낼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두목은 항상 자신을 바다 사나이라고 했다. 두목이 수영하는 걸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을 바다에 빠트리는 걸 좋아하긴 했다. 두목이 바다에 빠트린 사람만 15명이 넘는다. 그들은 모두 죽은 상태로 바다에 던져졌다. 

  -쟤 수영 잘한다더니 못하네? 

  두목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낄낄댔다. 나는 그런 농담에 웃어주지 않았지만, 두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댔다. 두목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두목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눈치챘어야 했다. 

  시체를 그냥 바다에 던지면 곤란하다. 내장에 차는 가스 때문에 수면 위로 떠 오른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바다에 던진다. 배를 가르는 건 내 몫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과정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비린내가 역했던 건 기억난다. 아직도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비가 오면 그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때가 좋았지. 냄새를 맡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인데. 나도 모르는 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것 같다. 


  부하들이 속초로 따라오겠다고 했다. 부하들의 말투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부하들은 알았다고 했다. 나도 안다. 나는 썩은 동아줄이다. 그래서 슬금슬금 눈치 보며 영수의 동아줄로 옮겨 가는 놈들도 밉지는 않다. 그래도 두 번 묻는 부하들이 없다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화가 많아짐과 동시에 눈물도 많아졌다. 얼마 전에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맥주를 먹어서인지 감정이 훅 올라왔다. 사나이답게 눈물을 닦았지만, 애석하게도 콧물은 미처 막지 못했다. 덕분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코를 훌쩍여야 했다. 같이 영화를 보던 부하들은 내가 비염에 걸린 줄 알고 감기약을 사오겠다고 했다. 아무리 깡패들이라지만 너무 둔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는 걸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을 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동이다. 


  -잠깐 쉬다 온다고 생각하십시오. 

  영수 따까리가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쉬라, 마라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성질이라도 부려볼까 했지만 그만뒀다. 화낸다고 달라질 게 없기도 하고, 또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맞는 말 아닌가? 잠깐 쉬다 오지 뭐. 

  문제는 어떻게 내려가느냐였다. 이십 대 이후로 운전기사 없이 어디 가본 적이 없었다. 뒷좌석 말고 타본 적이 없다. 차도 내 소유가 아니다. 두목 때까지만 해도 차는 타고 다니는 사람 소유였는데, 영수가 부임한 이후로 차는 전부 조직 소유였다. 영수는 예전부터 우리가 하나의 기업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녀석은 깡패보다는 비즈니스 맨이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 비싼 금시계 같은 걸 차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영수는 나랑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이 세계도 힘보다는 머리라고 했었다. 그때는 자기가 힘이 약하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내 머리가 나쁘다는 걸 돌려 말한 거였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영수한테 차를 가지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사무실에서 짐을 쌌다. 부하들은 소파에 앉아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분노인지 우울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진짜… 아무도 갈 생각 없냐? 

  다들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가 기운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뒷모습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괜히 미안해졌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야유회에 억지로 끌고 가는 부장이 된 기분이 이럴까. 조직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영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막상 차에 올라타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여행가는 느낌도 나고 그랬다. 처음에는 가기 싫어하던 부하들도 왠지 다들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내려가는 인원은 나까지 총 넷이었다. 이 차 안에 네 명이 탄 적은 없다. 우선 뒷좌석에 누군가와 같이 타본 적이 없다. 

  -좀만 문 쪽으로 붙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님.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건지 어이없어서 웃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뒷좌석에 세 명이 앉기엔 생각보다 자리가 좁았다. 그냥 앞에 앉을 걸 그랬다. 

  -가서 뭐 하실 겁니까? 떡대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웃는 낯이라 그런지 왠지 밉지 않았다. 다들 가스라도 흡입한 사람처럼 바람 빠지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그냥 담근 거 아닙니까? 

  유일하게 웃음기 없던 벽돌이 말했다. 속초에 다른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긴 했다. 속초 가서 할 일이 있다는 영수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혹시 그 할 일이라는 게 수영은 아닐까. 


  속초는 생각보다 더웠다. 도착한 역전에는 사람이 붐볐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남쪽이라 그런가. 한국이 아무리 좁다 해도 위와 아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벽돌이 영수 따까리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부하들과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가서 뭘 하라고도 안 알려줬습니까? 

  떡대가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부하들이 드디어 미친 건가 싶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떡대는 열이 올라왔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숙소 주소 받아왔습니다. 

  벽돌이 말했다. 

  숙소는 남자 넷이 머물기엔 좀 좁았다. 부하들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칼, 망치, 빠루 같은 무기부터 컵라면, 휴지, 물티슈 같은 생필품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도대체 속초에 뭘 하러 온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런 데 올 때 필요한 건 지갑이지 멍청이들아. 내가 낄낄대자, 다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막내가 짐을 풀 때는 분위기가 제법 험악해졌다. 막내는 가방부터 깡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알록달록한 가방에 포켓몬 스티커가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가방 안의 내용물이었다. 

  -물총은 왜 챙겨왔냐? 

  벽돌이 발로 막내의 머리를 밀었다. 막내는 바닥으로 엎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발이 배에 닿는 타격음과 막내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번갈아 들렸다. 쿵짝쿵짝. 리듬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엇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 소리들이 명상 음악처럼 느껴졌다. 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수도꼭지를 안으로 넣었다. 수돗물이 싱크대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냥 웃었다. 웃음이 계속 삐져나왔다. 

  벽돌은 여전히 화가 덜 풀린 채 씩씩거렸다. 막내는 신음을 뱉고 있었고, 나머지는 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여기는 너무 덥다. 더운 것도 더운 건데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었다. 이렇게 보니 영수에게 밀려난 게 실감 났다. 너무 더워서 바다에라도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물총 안에 물이 다 찼다. 

  벽돌은 아직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설마 자기한테 쏘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아쇠를 당기자, 벽돌의 얼굴로 물줄기가 뻗었다. 벽돌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너무 구겨져서, 웃는 건지 화난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녀석이 손을 휘적거리며 물줄기를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물총은 계속 벽돌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아. 진짜 그만하십쇼. 

  벽돌한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의 입꼬리도 들썩거리는 게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여행이라도 온 것 같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벽돌이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물을 맞으며 말했다. 물총을 멈추고 내가 왜 이러는지 생각했다. 

  -재밌잖아. 


  속초의 온도는 35도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한참 마루에 엎어져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습기였다. 심지어 거구의 장정들이 내뿜는 숨 때문에 숙소 안의 공기가 습식 사우나와 버금갈 정도였다. 영수 이 자식. 우리를 쪄 죽일 목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제가 선풍기라도 사오겠습니다. 

  막내가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 원짜리를 두 개 꺼내려다, 그냥 카드를 쥐여줬다. 벽돌이 나가는 막내에게 한 마디 거들었다. 

  -올 때 아이스크림. 

  막내가 인사를 꾸벅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막내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던 우리도, 의지를 잃고 바닥에 쓰러져만 있었다. 해가 지고도 꽤 시간이 지났을 때쯤 밖에서 뭔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모두 심신미약 상태라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막내가 돌아왔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다음 들린 것은 낑낑거리는 신음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이 들었다.

  내가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막내보다 먼저 눈에 보인 건 선풍기라고 부르기에 너무 거대한 크기의 선풍기였다. 화가 나지 않았다. 너무 더워서 맛이 간 걸까. 웃음이 나왔다. 별일이 다 있구나. 내 웃음소리에 부하들이 뛰쳐나왔다. 막내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일단 막내를 자리에 앉히고 떡대와 벽돌이 선풍기를 들어 올렸다. 선풍기는 두께와 너비 모두 거대했다. 어떤 각도로 돌려도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부하들의 표정에서 짜증이 솟았다. 막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손에 검정 봉투가 들려있었다. 떡대가 선풍기를 던져놓고 검정 봉투를 뺏어 바닥으로 탈탈 털었다. 검정 봉투 안에서 쏟아진 건 바밤바였다. 벽돌의 표정이 아까처럼 구겨졌다. 

  -장난하냐? 

  막내의 긴장된 얼굴에 주먹이 날아갔다. 벽돌은 쓰러진 막내를 계속 발로 밟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떡대와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들 이미 몸속의 땀을 전부 배출한 탓에 얼굴이 푸석해져 있었다. 나는 바밤바를 한 집어 들어 봉지를 깠다. 이거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는데. 기왕이면 메로나가 좋지만, 속초의 맑은 공기가 마음을 정화한 탓인지 바밤바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밤 향기가 났다. 

  -맛있다 이거. 

  벽돌과 떡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막내도 가드 올린 팔을 내리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부하들은 주섬주섬 옷을 털고 내 앞에 쏟아진 바밤바를 하나씩 챙겨가 입 안으로 넣었다. 밖으로 나오니 의외로 시원했다. 바닷바람이 불었고,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해가 지니 이곳도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바다나 보러 갈까. 

  -…좋습니다. 

  벽돌도 막상 입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가니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 - 12 - 다. 진작 나와 있을걸. 선풍기로는 낼 수 없는 개운하고 말끔한 공기가 녹아내릴 뻔했던 뇌를 시원하게 청소해주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스스로 생각하고도 놀랐다. 아무래도 갱년기가 맞는 것 같다. 


  종일 땀을 배출했던 탓인지, 숙소의 밤은 의외로 편안했다. 단점이 있다면 모기가 날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공기 맑은 곳이라 그런지 덩치도 컸다. 물론 밤새 막내가 모기를 내쫓은 덕분에 우리의 밤은 편안했다. 막내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벽돌은 아침부터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원하던 대답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기하랍니다. 

  내가 통화 내용을 묻자 벽돌이 그렇게 답했다. 벽돌이 통화한 사람은 영수 따까리였다. 떡대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었다. 너무 더워서 아무 잡념 없이 멍하니 있었다. 

  -바다나 보러 갈까? 

  다들 눈만 꿈뻑거렸다. 내가 옷을 주섬주섬 꺼내자 부하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막내는 가까우면서 경치가 좋은 해변이 어디인지 검색했다. 나는 물총을 들고 쏘는 시늉을 했다. 벽돌이 옷을 찾다 말고 움찔했다. 


  차는 여전히 좁았다. 막내는 뭐가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벽돌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막내의 얼굴을 때릴 것 같았지만, 아무튼 내색은 안 하고 있었다. 차 안은 숙소보다 더웠다. 금세 우리가 내뿜은 이산화탄소로 가득 찼다. 

  막내가 에어컨이 고장난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벽돌이 거짓말이면 죽인다고 막내를 협박했다. 에어컨 통풍구에선 진짜 바람이 나오고 있긴 했다. 따뜻한 바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제없었는데 갑자기 고장이 난 듯했다. 오랜만에 장거리 주행을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바밤바 남은 거 있냐. 

  벽돌이 막내에게 물었다. 막내는 어제 다 먹었다고 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막내는 입을 달싹거렸다. 

  -바밤바 그래도 먹을 만하지 않았습니까? 

  -닥쳐.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오는 건 땀방울밖에 없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막내는 여전히 실실거렸다. 100kg은 우습게 넘는 덩치들이 좁은 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상황을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 


  해수욕장은 고요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사람이 많기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사람이 없을 줄은 몰랐다. 속초 해수욕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끝없이 길게 뻗은 모래사장 위에 거구의 남자 넷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잠시 침묵했다. 뭘 하러 왔더라. 우리는 바다를 보러 왔었다. 바다를 보긴 했지만 뭔가 충족되지 못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을 해수욕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총 가져왔냐. 

  벽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 

  해가 뜨거웠다. 다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눈 밑이 짙게 물들었다. 벽돌이 먼저 신발을 벗고 바다로 달렸다. 벽돌이 막내에게 손짓하자 막내도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따라나섰다. 나는 그냥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정장 바지 아래로 모래 알갱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모래사장 위에 자리를 잡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따 털고 앉으셔야 됩니다. 

  떡대가 옆자리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맥주만 있으면 정말 완벽하겠는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막내를 시켜려다가 말았다. 막내에게는 일을 맡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벽돌과 막내는 벌써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벽돌이 모래사장 위에서 씨름인지 레슬링인지 모를 기술을 시전했고, 막내는 계속 넘어졌다. 퍽. 퍽. 모래사장에 머리가 박히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명상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평화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난 산보다 바다가 좋은 사람이야. 

  두목도 바다를 좋아했다. 언젠가 무게를 잡고 말하길래 못 들은 척했다. 원래 저런 말 하던 양반이 아닌데 말이다. 갱년기가 왔나 싶었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는 걸 안건 나중이었다. 두목이 박해일이랑 탕웨이가 나오는 멜로 영화에 이입했다는 게 좀 징그럽게 느껴졌다. 두목은 박해일 보다는 박상면이랑 더 닮았다. 두목은 바다를 좋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빠트린 걸까? 모르겠다. 


  나도 바다가 좋다. 시원하고, 비린내와 푸른색 파도도 마음에 든다. 부하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재밌게 놀고 있다. 웃통을 다 깠고, 물에서 목만 내놓고 있다. 

  -안 들어오십니까? 

  나는 손만 흔들었다. 몸을 적시긴 싫었다. 햇빛만 맞고 있어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서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잠이 올 것도 같았다. 모래 위에 누우니 까슬한 촉감이 느껴졌다. 할머니 베개를 벤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제 더워서 채우지 못한 잠이나 마저 잘 심산이었다. 선글라스를 꺼내 썼을 때쯤, 바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종국에는 비명처럼 들렸다. 

  -뭐해! 

  소리 질렀지만, 해안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막내가 바다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 놀고 있다는 건가 싶어 다시 누우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막내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벽돌과 떡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내던지며 해변으로 달렸다. 

  -뭐하냐고! 

  내가 벽돌과 떡대의 근처까지 가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그제서야 들은 체를 했다. 둘 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바다의 빛이 얼굴에 반사되어 더욱 새파랬다. 떡대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어버버 대는 탓에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막내가 있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막내가 손을 흔든 건 인사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조류에 휩쓸린 것 같았다. 

  -어쩌냐. 벽돌과 떡대를 번갈아 봤다. 둘 다 고개를 푹 내리고 있어서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와 비슷한 표정일 것 같았다. 막내는 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소용돌이에 빨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근처에 워낙 사람이 없던 터라, 안전요원도 튜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급박한 상황에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어부어부어부어부…  

  막내는 코와 입만 내놓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저기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지만, 막상 구하러 들어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00kg이 넘으면 수영은 고사하고 몸을 물에 띄우는 것도 어렵다. 

  -어쩔 거냐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벽돌은 윗옷을 벗어 던졌다. 떡대도 눈치를 보다가 밍기적 옷을 벗었다. 벽돌이 나를 힐긋 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떡대는 몸에 꽉 끼는 옷을 아직도 벗는 중이었다. 막내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머리까지 가라앉았다가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와 다시 첨벙거리더니 몇 번 지나고 나서는 올라오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벽돌은 막내가 있는 곳으로 열심히 팔다리를 저었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발을 열심히 굴리는 것에 비해 속도가 너무 느렸다. 파도 때문에 뒤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벽돌이 바다와 막내 사이 삼 분의 일 지점 정도에 도달했을 때 떡대도 드디어 탈의를 마쳤다. 그대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발만 살짝 담그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는 헛둘헛둘, 구령까지 넣어가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죽을래? 

  내 목소리에 떡대가 고개를 돌렸다. 

  -물이 너무 차갑습니다. 형님.

  내가 정색하자, 떡대는 주눅 든 표정으로 바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뭐라 투덜대는 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척했다. 벽돌은 어느새 절반까지 가 있었다. 떡대도 바다에 몸을 던졌다. 

  떡대는 벽돌보다 더 느렸다. 나름대로 팔은 열심히 휘젓는 것 같은데 속도가 전혀 나지 않았다. 조금씩 전진할 때마다 파도에 휩쓸려 해변으로 다시 쓸려왔다. 몇 번이고 해변으로 밀려오자, 발이 닿는 데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곳까지 도달해서야 수영을 시작했다. 떡대도 물에 뜨는 법 정도는 아는 듯했다. 벽돌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막내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다. 

  벽돌이 막내에게 닿을 즈음, 떡대도 절반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의외로 물에 뜨는 데는 능숙한 것 같았다. 막내는 거의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그건 수영이라기보다는 헤엄에 가까웠다.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젓는 것치고는 간신히 물에 뜨는 정도였다. 저러다 같이 휩쓸리지는 않을까.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세 남자가 바다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벽돌이 막내를 따라 바다로 잠수했다. 떡대는 여전히 헤엄을 치는 중이었다. 벽돌이 막내를 붙잡고 바다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잡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막내도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변을 향해 헤엄쳤다. 벽돌도 그 뒤를 따라 헤엄쳐왔다. 문제는 떡대였다. 떡대는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수평선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야! 돌아오라고!

  내가 소리쳤다. 막내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했다. 떡대는 계속 앞으로 헤엄쳤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헤엄을 잘 쳤나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떡대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벽돌과 막내는 자신들을 지나치는 떡대는 멍하니 지켜봤다. 한참을 지켜보다 다시 슬금슬금 돌아왔다. 떡대는 계속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어서, 떡대의 형체가 작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떡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앉아서 바다만 바라봤다. 해는 진 지 오래였다. 조금의 빛도 남아있지 않아서 우리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건지, 모래사장에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조류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벽돌이 말을 꺼냈다.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지 묻자. 벽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영할 줄 알았냐? 

  내가 막내에게 물었다. 막내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어두운 탓에 벽돌과 막내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신고해야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경찰에 신고하는 건 자수와 다름없었다. 조직 고위층이 경찰과 유착 관계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여기까지 내려온 이상 조직이 우릴 보호해 줄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공중전화로 신고하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막내가 공중전화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사이에 벽돌은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벽돌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돌의 표정을 볼 수 없어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멀리서 모래를 박차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막내는 숨이 차는지 말을 한 호흡에 이어가지 못했다. 

  -금방 올 테니까 대기하랍니다. 

  말을 듣자마자 등골에서 땀이 한 줄 흐르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와 벽돌은 일단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막내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쫓아왔다. 경찰차가 보이지는 않았다. 벽돌은 급하게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나도 급한 대로 조수석에 앉았다. 막내는 힘이 달리는지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이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있었다. 벽돌이 차에 타려는 막내를 주먹으로 후려치려 했다. 

  -일단 타. 

  내가 말했다. 막내는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숙소로 가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습기로 가득했다. 에어컨이 고쳐졌나 싶어서 다시 틀어봤지만 여전히 따뜻한 바람만 나왔다. 벽돌이 에어컨을 끄려고하는 걸 내가 손으로 막았다. 따뜻한 바람을 계속 맞고 있으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벽돌과 막내는 창문을 열고 싶은 것 같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 명 사라지니 아까보다는 쾌적한 느낌이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도로는 가로등만 간간이 있을 뿐 대부분 어둠에 침식되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벽돌이었다. 

  -자수할 생각이었냐? 

  -떡대 형님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내는 거의 울먹였다. 벽돌은 무표정했다. 화가 난 건지, 웃음을 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떡대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떡대가 물에 들어가기 전에 죽고 싶냐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까지 몸을 푼 건 죽기 싫다는 뜻이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도착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숙소의 샤워기에선 바닷물보다 차가운 물이 나왔다. 벽돌이 먼저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 했는데, 오 분도 안 되어 뛰쳐나왔다. 막내는 경찰에게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을 끄고 있었다. 나는 혼자 젖지 않았기에 옷만 갈아입고 바닥에 누웠다. 

  벽돌은 씻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한참 기다렸고 했다. 막내는 숙소 밖 계단에 앉아있었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 누워있어야 했다. 

  누운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막내와 벽돌 모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벽돌과 막내는 이불을 조심히 펼쳤다. 불이 켜져 있어 눈이 부셨다. 벽돌과 막내도 불을 끄지 않은 채로 누웠다. 나도 불이 켜져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숙소는 어제보다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덕분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구가 한 명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벽돌과 막내도 어제보다는 자유분방하게 누웠다. 

  -죽었을까요? 

  막내가 물었다. 

  -자라. 

  벽돌이 대신 대답했다. 


  잠을 설친 덕분에 어제보다 몇 배는 피곤한 아침을 맞이했다. 막내와 벽돌은 아직 눈을 뜨지도 못했다.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이년은 지난 것 같은 피로였다. 벽돌과 막내를 깨워 바다로 향했다. 벽돌은 갑자기 일어난 탓에 거의 졸면서 운전했다. 막내는 계속 돌아가자고 중얼거렸다. 경찰을 만나면 어떡하냐는 거였다. 

  -어떡하긴. 감방 가야지. 

  내 말을 듣고 막내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해변은 어제처럼 아무도 없었다. 혹시 내가 어제 꿈을 꾼 건 아닐까. 사실 떡대는 내려온 적도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변 위 주차장 구석에 주차되어있는 경찰차를 보고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막내는 몸을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벽돌은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왔다. 겉면에 일본어가 써있었다. 나는 두목을 떠올렸다. 내 몸에 적힌 일본어를 떠올렸다. 두목이 목 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떠올렸다. 

  -그만해야겠어. 

  -뭘 말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돌은 한참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 나는 벽돌의 얼굴만 멀뚱하게 쳐다봤다. 벽돌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도 깡패 같지는 않았습니다. 

  벽돌이 혼자 말하고 혼자 낄낄댔다. 나도 따라 웃었다. 

  -재미가 없잖아. 

  왜 그만두냐는 벽돌의 질문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벽돌은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따라 들이켰다. 목 끝에서 시원하고 알싸한 감각이 느껴졌다. 속초로 보내진 시점에서 우린 이미 깡패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신이 있다고 다 깡패는 아니니까. 


  해양경찰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몇 명 돌아다녔다. 그중 몇 명 정도는 보트를 타고 돌아다녔고, 나머지는 해변을 수색했다. 경찰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도, 힘도 없었다. 우린 해변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봤다. 어제보다 햇빛이 강했다. 

  벽돌이 그만두면 뭘 할 건지 물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두목이 내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영수를 찾아가 복수했을까. 잘 모르겠다. 

  -일본어나 배워 보려고. 

  벽돌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문신에 적힌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지. 

  벽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햇빛 탓인지 맥주는 그새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기 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서서 바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캔을 흔들어 남은 맥주를 뿌렸다. 이미 거의 다 마신 상태라 거품이 더 많이 나왔다. 거품은 파도와 함께 부서졌다. 마지막 남은 맥주까지 털어내자 더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캔도 구겨서 바다로 던져버렸다. 

  -거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해양 경찰 조끼를 입은 사람이 나한테 다가오며 소리쳤다. 호루라기 소리도 들렸다. 막내는 이미 어디로 숨었는지 없었고, 벽돌은 모르는 사람처럼 딴 곳을 보며 맥주만 홀짝였다. 나는 웃옷을 벗어 던졌다. 경찰이 잠시 주춤했다. 주머니에서 뭘 꺼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 소리에 경찰은 경계 태세를 한층 더 강화했다. 나는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경찰이 윽박지르는 소리가, 벽돌이 당황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맥주보다 시원한 바다의 온도를 느끼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떡대는 어디로 갔을까. 모르겠다. 다만 배를 가르지 않았기에, 지중해 어딘가에서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대신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팔을 휘적거리자 해초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팔을 휘젓는 대신 그 느낌에 집중했다. 

  문득 사무실에 걸려있던 액자가 떠올랐다. 액자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떠올렸다. 그 안에 적혀있던 글자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액자가 걸려있는 사무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나른해졌다. 맥주를 마신 탓일지도 모른다. 그럼, 辛い時は休みます.



이재윤(경제금융학부)

연속으로 학술상에 이름을 올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여러가지 고민으로 바쁜 한해였는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기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