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0 호 손글씨가 유행하는 이유, '라이팅힙' 들여다보기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라이팅힙(writing-hip)’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SNS에는 손글씨로 직접 쓴 필사 노트나 자신이 작성한 문장을 공유하는 게시물이 자주 올라오고 있으며, 관련된 모임이나 필사 도서와 문구용품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종이와 펜 앞으로 이끄는 것일까?
라이팅힙이란
라이팅힙은 '쓰기(Writing)'와 '힙(hip)'의 합성어로, 손글씨 쓰기나 필사를 힙한 문화로 즐기는 현상을 뜻한다. 이는 단순한 글쓰기 행위를 넘어 필사, 문장 수집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며 개인의 성향과 감각을 드러내는 독자적인 창작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존의 ‘텍스트힙(text-hip)’과 연결된다. 텍스트힙은 주로 책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공유하는 ‘읽기 중심’의 문화였다면, 라이팅힙은 손글씨를 통한 ‘쓰기 중심’의 표현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활자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텍스트힙과는 달리, 라이팅힙은 능동적인 창작 활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렇듯 라이팅힙은 텍스트힙의 하위 맥락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쓰기가 읽기보다 더 주체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국내에 불어닥친 활자 열풍이 한발 더 나아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독서 필사 관련 게시글 (사진: https://www.newsian.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77156)
라이팅힙의 등장 배경
디지털 기술이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관심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타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쓰기’ 행위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빠르게 흐르는 디지털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하는 심리적 필요가 커지면서, 정적인 활동으로 직접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필사나 문장 수집 같은 행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신만의 흐름을 찾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함께 개성과 취향의 표현이 중시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글을 쓰는 것이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화적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내면에 집중하고 아날로그적 감각을 되찾으려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라이팅힙은 새로운 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라이팅힙에 빠진 이유
라이팅힙이 주목받는 이유는 ‘쓰기’ 활동이 정보 과잉과 일상의 피로 속에서 잠시 멈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극과 속도감에 지친 일상에서 직접 손으로 글을 써 보는 활동은 디지털 환경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몰입과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행위는 정서적 안정감과 심리적 여유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라이팅힙은 점차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상 깊은 문장을 고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옮겨 적고, 그 결과물을 공유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표현 방식으로 기능한다. 단순히 감정을 정리하는 도구를 넘어, 자신의 스타일과 감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라이팅힙은 감각적인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네 모임부터 관련 업계까지, 라이팅힙의 확산
라이팅힙의 영향력은 크게 글쓰기와 필사로 나눌 수 있다. 글쓰기는 문예 창작 활동과 일기 쓰기 등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활동으로, 글방과 다양한 글쓰기 모임이 주목받고 있다.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 온·오프라인으로 운영하는 글방은 회당 5만~7만 원의 가격대임에도 매번 빠르게 모집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이다. 또한 글쓰기와 독서 모임이 1500개 이상에 달하는 모임 플랫폼 '트레바리'의 누적 회원수의 경우 2024년 기준 11만 명을 기록했다.
글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필사는 출판 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Z세대 사이에서 필사책 판매량이 전년 대비 692% 증가했고, 같은 기간 예스 24에서도 163% 증가율을 보였다. 유선경 작가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는 2025년 초 70쇄를 돌파했다. 이러한 인기에 따라 필사책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시와 산문과 같은 문학 장르 기반의 전형적인 분야에서 철학 도서나 법학 도서에 이르기까지 필사 도서 분야가 다양해지고 있다. 아이돌 그룹의 가사 필사집이나 한 문장씩 필사하는 필사집이 출판되기도 했다.
▲ 2020년~2024년도 교보문고 Z세대 필사 도서 판매추이 (사진: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5151145?sid=102)
▲ 인기 필사 도서 (사진:https://www.nget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8693)
예쁜 손글씨를 위해, 손글씨와 관련된 강의도 인기이다. 클래스 101에서 올해 1분기 글쓰기·캘리그래피 강의 결제 건수는 1년 전보다 601%, 관련 매출은 1376% 증가했다.
이러한 라이팅힙은 문구 업계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지난해 온라인 서점 예스 24 문구·기프트 분야 판매량은 전년 대비 18% 증가, 교보문고는 20대 문구류 판매가 1년 전보다 11% 증가했다. 온라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에서도 올해 1~2월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이 전년 대비 75%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29CM가 개최한 ‘2025 문구 페어(인벤타리오)’에서는 5일 동안 2만 5000명 이상이 방문했으며, 인기 한정품 문구류는 행사 시작 1시간 만에 완판 되기도 했다. 필사하는 책을 위해 북커버나 문진, 북 스탠드 등 독서 제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 2020년~2024년도 교보문고 Z세대 필기구 판매추이 (사진: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5151145?sid=102)
▲ 29CM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에 전시된 다양한 문구용품 (사진: https://news.nate.com/view/20250402n28364)
디지털에서도 즐기는 라이팅힙
라이팅힙은 펜과 종이가 없더라도, 노트북 타이핑이나 전자기기의 필기앱을 이용해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타이핑웍스’와 같은 디지털 필사 전용 웹사이트도 등장했다. 이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별다른 준비물 없이도 더욱더 자유롭고 편리하게 라이팅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라이팅힙, 유행을 넘어 문화로
대중문화평론가 하재근은 “책과 글쓰기를 SNS 과시용으로 소모할 경우 과거 여러 유행처럼 또 다른 인증 놀이로 끝나버릴 수 있다. 외부 시선과 무관하게 글쓰기를 취미로 만들려는 노력이 이어져야 라이팅힙 트렌드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라이팅힙이 트렌드가 아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개인의 진정성 있는 글쓰기 태도와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또한 출판 업계와 도서 업계의 지속적인 상품 연구와 개발도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지연 기자, 조윤정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