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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80 호 [교수칼럼] 구속은 창작의 조건이다

  • 작성일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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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4207
이해람

건조한 공학전공자로서의 삶을 사는 가운데, 내 일상 속에 동기부여이자 활력이 되어주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약 20여년간 꾸준히 연주해 온 색소폰이다. 나의 색소폰 연주 분야는 소프트 재즈 색소폰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곡의 이야기 속에, 소프트한 재즈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가는 연주를 소프트 재즈라고 한다.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활동을 하면서 항상 가슴에 담고 있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화려한 연주 테크닉도 빠른 손놀림도 아닌, 어떤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가장 단순한 기본기, 즉 호흡과 리듬 그리고 박자를 매일의 연습 가운데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즈만큼 연주자의 개성과 연주자가 바라보는 또는 느끼는 곡에 대한 느낌이나 해석이 자유로운 장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재즈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무대를 유심히 바라보면, 한가지 눈치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재즈니까, 즉흥연주니까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악보라는 것이 덜커덩 놓여있다. 그런데, 그 악보는 거의 비어 있고 멀리서 본다면 그냥 백지나 조금 끄적거린 것 같은, 무언가 쓰다만 것 같은 악보처럼 보인다. 게다가 연주자들은 연주하는 동안 이 악보를 보통의 연주자들이 보는 것처럼 집중해서 악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악보는 재즈 연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곡의 중심이 되는 멜로디와 코드(화음)이 적혀있고, 재즈 연주자들은 각각의 멜로디의 중심과 화음의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 연주를 하게 된다. 이런 한장 또는 두장 짜리 악보를 리드시트라고 한다. 재즈에서 들려지는 자유로운 연주는 바로 이 리드시트에서 철저하게 약속한 멜로디와 리듬과 화음이 서로를 배격하지 않는 가운데 어쩌면 사전에 철저히 훈련되고 약속된 그루부를 형성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2015년에 미국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허비행콕과 칙 꼬리아가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듯한 몽롱한 연주 가운데 이 둘의 무대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멜로디를 다른 이야기로 그려가고 있다는 것을 추상적인 관점에서 점증적인 방법으로 알아갈 수 있는 연주로 이어져갔다. 딱 한장의 리드시트에 맞춰진 두 사람의 합주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리드시트는 멜로디의 가장 기본이 되는 투파이브원(2-5-1)으로 구성되는 가이드톤이 있고, 재즈로서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텐션과 도미넌트 5음 체계를 적용해서 멋진 즉흥연주(임프로비제이션)를 구사해 내게 하는 기본 원칙이다. 철저한 규칙안에서 최대의 자유 혹은 한계를 뛰어넘는 화합의 새로움을 누릴 수 있는 재즈 연주의 원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러한 자유는 규칙이라는 범주안에서 최대의 강점을 갖게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이 곧 자율이라는 개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최근에 손으로 무엇을 만들기 보다는 기계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작해내는 일에 익숙하다. 특히 3D 프린팅, 컴퓨터 캐드, 일러스트 등이 보편화 되면서 더욱 일상적인 일이 되어 가고 있다. 과거의 건축이나 디자인 양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매우 획일화 되어 있었지만, 최근 컴퓨터와 3D 프린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상상의 한계는 없어 보인다. 단순한 형상에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기이한 문양과 양식이 자유롭게 연출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명확한 한 선이 있는데, 정확한 가이드 라인을 지키지 않으면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작가 또는 제작자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기이한 모양을 디자인해서 출력물을 얻으려고 한다면, 기계의 작동의 규칙뿐만 아니라 그래픽 또는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도형의 생성에 관한 조건이나, 3D 프린터 출력 조건이 지켜져야만 구현이 된다는 것이다. 즉,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절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최근의 우리의 일상에서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기계나 로봇은 재즈적인 관점에서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필연적인 자기 규제적인 법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술가에게  더욱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화법을 완성하기 전까지 거장 밀레의 그림을 수도 없이 모사했고, 그의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규칙화해서 습작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이 갖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즉, 기존의 규칙 속에서 임프로비제이션화 된 자신만의 그림은, 자신의 화법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철저한 가이드 라인과 자신의 그림의 독창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텐션과 꾸밈의 조화가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구속 또는 규칙은 획일적이거나 통제라기 보다는, 고유성과 확장 가능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양문 형식의 통로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통로는 공명(또는 공감)되는 새로운 조화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발전적 원리일 수 있다.

염기원 교수 (휴먼지능로봇공학과)